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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큐티설교 (에스겔 8:1-18) 영적 각성을 외치다
| 설교일 | 2019-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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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에스겔은 집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때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의 앞에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에스겔의 앞에 앉은 이유는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의 소망의 말씀이 내리길 바란 것입니다.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 하나님이 거하실 그 장소에 우상이 가득하고 그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1-4절까지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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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2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가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4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 |
하나님은 1절에 에스겔의 집에서 불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또 4절에 성전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는데 그발 강가 들에서 본 모습 즉 불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발 강가에서도, 에스겔의 집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에도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어디서나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 어디서나 하나님은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어디서나 동일한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것을 이처럼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에 국한 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당시 근동 사람들은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이 있고 그 신은 그 지역을 벗어나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전염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거하신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안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아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전 밖에서는 악을 거리낌없이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난 자신들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세상 어디에나 거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면 마음이 풀어지고 하나님의 시선이 덜 의식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계실뿐 아니라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통해서 유다를 향하여 또 우리를 향하여 그러한 영적인 각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6절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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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전에서는 거룩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전뜰 제단문 어귀 북쪽에 하나님을 질투하게 만드는 가증한 우상을 세우고 그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6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성소를 멀리 떠날 수밖에 없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말씀하시며 또 다른 장소로 이끄십니다.
에스겔이 환상중에 뜰문의 담을 헐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 70인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10절과 11절을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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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11 이스라엘 족속의 잘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
70명의 장로들이 각기 벽 사방에 그려진 우상들을 향해 향로를 피우는 것이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중심역할을 하였던 사반, 그 사반의 아들 중 하나인 야아사냐도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않으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당연히 여깁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4절을 보면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16절에는 여호와의 성전 문 현관과 제단사이에서 약 25명의 제사장들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여 태양에게 예배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백성의 여인들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제사장 만큼은 끝까지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하나님께 등을 보여 성전을 등지며 동쪽 때양에게 예배하는 패역한 반역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에스겔을 이끌고 성전의 구석 구석을 다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곳에 우상의 가증한 것이 섰으며 거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려 그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로 인하여 18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기지 않을 것이며 불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전서 3장 16절 17절에 성도들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바로 우리 각 개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예루살렘의 성전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훝어 보신 것처럼, 오늘 나의 삶 구석 구석도 자세히 훝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어떤 것도 우리의 삶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됩니다. 우상은 재물, 권력, 명예, 학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지를 빼앗는다면 우리 심령은 더럽고 가증한 것이 가득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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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오늘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보게 된 온갖 가증한 것들을 섬기던 유다의 70명의 장로들, 담무스를 섬기던 여인들,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우리의 내면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성전이 된 나는 나의 내면을 온갖 사악한 욕구들과 욕심들 이기적인 탐심으로 채워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려지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응답없이 돌아옵니까? 내 욕심의 우상들로 내 안이 가득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내 욕심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의 우상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할 때 나를 떠나십니다.
오늘 이 새벽 에스겔의 외침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고 내 안에 우상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에 더러움들을 정화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된 성전으로서의 회복은 거룩을 향한 몸부림, 그 영적 각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내주하심,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각성하고 종교의 개혁을 이루어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남유다의 왕 요시야와 히스기야처럼 우리 모두의 삶에 영적 각성과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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